파시조 통훈대부

파시조 통훈대부

우리 종중의 파시조이신 통훈대부 박대승 공의 과거 합격, 주요 관직, 퇴임 후 여생과 묘소를 소개합니다.

과거 합격

우리 종중의 파시조(派始祖)이신 통훈대부(通訓大夫)는 신라 초대 왕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제49세손으로 광해군 7년인 1615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송애공(松崖公)의 세 번째 손자이며 과거 무과에 급제하시고 여러 벼슬을 거쳐 통훈대부의 직위까지 오르셨습니다. 휘자는 대승(大昇)이십니다. 파시조란 시조(始祖) 또는 중시조(中始祖)에서 갈라져 나온 특정 지파(支派)의 제1세로서 그 문중에서 종지를 모아 정한 분을 뜻합니다.

신묘별시문무과방목 중 통훈대부의 무과 합격 기록
신묘별시문무과방목 중 통훈대부의 무과 합격 기록

효종 2년인 1651년 별시의 과거 급제자를 수록한 역사서인 “신묘별시문무과방목(辛卯別試文武科榜目)”의 내용을 보면 통훈대부는 무과에 합격하셨습니다. 이 방목에는 자는 진숙(進叔), 생년은 1615년(乙卯, 광해군 7년), 급제 나이는 37세, 본관은 경주(慶州), 거주지는 보령(保寧), 부친 휘자는 선교량이셨던 홍식(弘式), 형은 대유(大有)와 대정(大鼎)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경주 박씨 문중에서 과거에 합격한 선조들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자료로 정리하면 문과 5명, 무과 31명, 잡과(율과: 律科) 1명, 사마시(생원시) 합격자 5명(이중 2명은 문과에도 합격) 등 총 40명입니다. 그리고 이 연구원의 자료에는 월성 박씨로 기록된 조선시대의 과거 합격자는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있습니다.

주요 관직

통훈대부에 관한 내용은 규장각에 보관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다섯 차례, 정록(政錄)에 한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효종 8년, 즉 1657년 1월 15일(음력) 기록된 승정원일기에는 통훈대부께서 다경포(多慶浦) 만호(萬戶)로 발령받고 임금께 하직(下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직은 벼슬을 받고 임금에게 작별을 아뢰는 것이므로, 통훈대부는 이때부터 만호 직책을 수행했다고 판단됩니다.

다경포는 전남 무안군에 있었던 석성(石城)으로 왜구 방어 등을 위한 주요 군사기지 역할을 했습니다. 다경포 만호는 장교 19명을 포함하여 총 300여 명의 군대를 이끄는 지역 사령관이었습니다.

승정원일기 중 통훈대부의 다경포 만호 하직 기록
승정원일기 중 통훈대부의 다경포 만호 하직 기록

북부주부 보임 기록

현종 2년인 1661년 6월 22일(음력)의 승정원일기에는 통훈대부께서 북부주부(北部主簿)에 보임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북부주부는 종6품으로 한성부나 군기시 등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관직입니다.

승정원일기 중 통훈대부의 북부주부 인사발령 내용
승정원일기 중 통훈대부의 북부주부 인사발령 내용

통훈대부 보임과 조지서 별제

승정원에서 1678년 3월 12일(윤년, 음력)에 작성한 정록(政錄)에는 정3품인 통훈대부로 보임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어 1678년 3월 20일(음력)의 승정원일기에는 조지서 별제(造紙署 別提)의 보임을 임금께 사은(謝恩)하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은이란 벼슬 등을 받은 신하가 임금께 감사 인사를 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통훈대부는 무과에 합격하여 여러 국가 일을 하시다가 문과 직위인 정3품에 오르셨는데, 이는 공직에 계시는 동안 부단히 노력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중앙의 조지서는 한양(현재 서울)의 창의문 인근에 설치되어 종이를 제조 및 보급하는 국가의 주요 관청이었습니다.

정록에 수록된 파시조의 통훈대부 보임 기록
정록에 수록된 파시조의 통훈대부 보임 기록
승정원일기 중 통훈대부의 보임을 임금께 사은한 기록
승정원일기 중 통훈대부의 보임을 임금께 사은한 기록

퇴임 후 여생 및 묘소

통훈대부는 벼슬을 마치시고 고향인 보령 대천해수욕장 인근에서 여생을 보내셨을 것으로 보이는데, 작고하신 일자는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묘소는 현재의 보령시 대천해수욕장 남쪽 솔밭에 있는데, 묘지 상석에는 통훈대부행조지서별제경주박공대승지묘(通訓大夫行造紙署別提慶州朴公大昇之墓), 즉 통훈대부의 직위로서 조지서에서 별제의 직책으로 국가 업무를 수행하셨던 경주박씨 대승의 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상석은 묘소를 설립한 당시부터 모셔졌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통훈대부 묘소
통훈대부 묘소

송애공 등 통훈대부의 선대

송애공(松崖公)은 통훈대부의 할아버지로서 휘자는 여룡(汝龍)이시다. 어렸을 적에는 성품이 호탕하여 활 쏘는 법 등 무술을 수행하면서 장군이 되시는 포부를 가지셨다. 20여 세에 들어서는 무술연마보다는 학문에 전념하셨는데,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학업이 크게 진취하시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이셨던 우계 성혼선생과 토정 선생 등은 이에 크게 감탄하시고 널리 칭찬을 하셨다 한다.

송애공은 수차례 향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셨으나 벼슬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시다가 이조판서 이산보(李山甫)의 천거로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 종6품)에 보임되셨다. 그러나 광해군의 폭정 등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정국이어서 이를 마다하시고 보령지역에 은거하여 학문과 주민들을 돌보는 데 전념하셨다. 즉 계해년의 재난 등에서 주민들이 몹시 어려움을 겪을 때 수백 명의 사람을 도와 이들을 살렸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송애공은 항상 검소하고 절제된 삶을 사셔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셨는데, 당시로서는 비교적 긴 여생을 사시다가 1619년 72세에 서거하셨다.

송애공은 한 분의 아드님과 세 분의 따님이 있었는데, 이 아드님이 우리 종중 파시조인 통훈대부의 아버님이시다. 존함은 홍식(弘植)이며 선교량(宣敎郎)으로 국가 일을 하셨는데, 선교량은 조선시대 종6품 상계의 문신 품계였다.